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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드림 퍼먹기

흉터

by 렛쓰 2024. 3. 13.

'네가 어떻게 나한테….'

 

사람에겐 영원히 잊히지 않을 하나의 기억이 있다. 다시금 눈을 감으면 자연스럽게 곱씹게 되는 순간이.
매번 그럴 때마다 시작을 알리듯 허공에 울려 퍼지는 절규가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그 순간을 생경하게도 떠오르게 한다.

절망에 가득 차올라 두려움, 원망, 배신감에 떠는 눈동자,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 가냘프던 그 눈물. 아름답게도 망가져 금이 가기 시작하던 그 표정까지. 아아, 그래. 나는 네 그런 얼굴이 보고 싶었어. 고결하고 깨끗한, 절망이라고는 하나 모르는 네가 망가지는 모습을 원했던 거야!
더 부서지고 망가져 버려, 흔적도 없이 녹아 썩어 문드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두 번 다시는 희망이란 것을 눈에 품지 못하도록. 그렇게 망가져 버려, 사랑스러운 나의.

하지만 유독 그 순간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단순히 기억뿐 아니라 '흔적'으로도 남았기 때문이리라.


뭐든, 눈에 보이는 게 더 오래 가는 법이지. 그렇기에 차츰 희미해질지도 모르던 그 순간의 표정이 이토록 선명한 걸지도 몰라. 모두 네 덕분이야.

손을 올려 제 눈가를 가로지르는, 짙게도 남은 흉터를 매만진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스스로 그어놓고도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두려움에 휩싸이던 그 얼굴이란. 그렇게까지 나를 믿었어? 그렇게까지 내가 소중했어?


고통보다 더 큰 희열이 차올랐지만 괴로움을 호소하면 또 멍청하게 속아 내게 닿지 못하던 그 모습이란.

이렇게 매번 떠올리며 곱씹을 때마다 즐거운 기억이 있을까.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지만, 그보다 이르게 느껴진 눈가에 닿은 감각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올리며 방금까지 그리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지닌 이를 바라본다.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럼에도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고, 마침 자신의 기분이 좋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해 그 행동을 가만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뭐 하냐?"
"이거, 흉터요. 아프지 않으셨어요? 좀 궁금했어서..."

"이거?"

눈가에 난 흉터뿐 아니라, 온몸이 지겹게도 난 흉터들을 말하는 거겠지. 이걸 또 물어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땐 무어라 대답했더라. 생각보다 타인의 동정심을 사기에 좋은 장치였기에 깊이 생각한 적 없지만, 아프냐고 물어본 것은 또 처음이라. 허, 하는 소리를 내며 제 한 팔을 들어 보인다.

"알려줘? 아니면, 너도 남기고 싶어?"
"제,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요! 그냥, 신경 쓰여서..."


물론 진실을 말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참에 놀리기나 해볼까 싶어 씨익 웃곤 팔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흉터들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스테이플러 부분을 툭툭 두드린다.

"이거, 떼어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되는데요?"
"조각나."

"...네?"
"조각난다니까?"

물론, 그럴 일도 없고 그럴 리도 없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하여도 진심으로 믿고 경악하는 저 얼굴을 보자니 조금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초에 봉합을 풀자마자 조각나버릴 신체라면 멀쩡히 움직이지도 못한다. 흉터야 이미 굳어진 지 오래라 어떠한 거슬림도 통증이 없음에도 봉합한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굳이 답을 내놓으라면 어떠한 강박 때문일지도 모르지. 능력을 갖게 된 순간, 그리고 처음 상처를 입어 그 사이에서 피와같이 끈적한 검은 것이 흘러나오던 것을 보았던 때를. 지금은 완벽하게 능력을 다루면서도 그때의 공포감이 깊게도 박혀있기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한심하긴. ...아니지, 뭐.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잖아.

지금 이렇게, 매만지는 손길도 나쁘지 않고.

조금만 힘을 주어 만지면 터지기라도 할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제 흉터 위를 훑고 지나간다. 진짜 조각나요? 소심하게도 물어오는 목소리에 웃다 그럴 리가 있겠냐 답하며 길게 뻗은 네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본다.

어쩜 이렇게 모든 게 다를까. 성격이며, 눈빛이며, 색이며, 모든 것 하나하나 전부.

집중하느라 자신의 위로 거의 올라앉은 채로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지나치게 가까이 붙은 너를 바라보다 네 팔을 잡아 끌어당겨 안아 제 몸 위로 올리면 순식간에 당황함과 부끄러움에 붉어지는 얼굴을 가만 바라본다.

너야말로 그러다 얼굴 터지겠네. 속삭이며 여전히 손에 감긴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문득 조금은 메마른, 그럼에도 붉은빛을 띠는 입술을 바라본다.

너는 어디까지 내게 이용당할 건가, 어디까지 나를 받아들일 건가, 어디까지 알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할 것인가. 정말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웃음만큼 멍청한 건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든다.

날 먼저 건드린 건 너니까, 공평하게 해야지. 안 그래?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며 널 그대로 끌어당겨 반쯤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다. 욕망은 없다. 욕구도 없다. 이건 단순히 확인하기 위함이니까.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너와 다르게 네 반응 하나하나 뜯어 살피듯 눈을 깜빡이지도 않으며 맞닿은 입술을 움직여 그 살결을 탐한다. 코에 닿는 짧은 호흡이, 조금만 움직임을 틀어도 크게 떨리는 손끝이, 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건가, 착각할 정도로 크게 울리는 심장박동이, 이 모든 것이...


아, 그래. 이건 또 색다르네. 그럼에도 한쪽에서 드는 기시감을 무시할 순 없다. 이 이후에 네가 내게 대하는 태도의 변화는 없을 거라는 그런 생각. 만약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제게 다가온다면 순간적인 즐거움이야 있겠지만, 지금만큼의 흥미는 없을 거라는 것 또한.

너는 금방 망가지지는 않겠어. 아니, 망가지지는 마.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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