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삶이라 생각했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온기를 내어 추위를 덜어주는 방,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와 이불, 화려한 드레스와 세상의 모든 빛을 품고 있듯이 빛이 나는 보석들. 그 모든 것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고, 차고 넘칠 만큼 손에 쥐고 있었기에 그녀를 바라보는 모든 자의 시선은 부러움에 휩싸여 있었다.
제국에서 운영하는 가장 큰 상단, 그 상단 주인 귀족 집안의 자식. 수많은 손길이 자신에게 무엇이라도 떨어질까 바라며 제게 내밀어지는 가식적인 손길들과 웃음, 말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오히려 불운한 삶이라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 어떠한 가족이라도 늘 화려하고 화목하게 보이겠지만 다들 숨기고 싶어 하는 수치가 하나쯤 있기 마련이지 않던가.
자신이 바로 그 존재였다. 오직 남자만이 정점에 군림 할 수 있고, 유력한 위치에 서서 집안을 더 풍족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귀족에게 있어 여식이란 시집을 보내 가문의 관계를 두둑하게 하는 하나의 도구, 혹은 주제도 모르고 사치를 부려 집안의 돈을 마구 쓰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으니까.
다행이라면 그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제 부모와 형제들은 자신을 무시하기는 하지만 어떠한 손찌검도, 참견조차 하지 않았다. 딱 한 명 있는 전용 시녀라곤 자신이 왜 이런 애 밑에서 일을 해야 하냐는 눈으로 훑어보기야 했지만, 욕심이 많은 이라 금화 몇 개를 쥐여주면 없는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그 점은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이용했다.
우습게도 귀족 여자보다 평민 사내아이에게 무언가의 배움의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자신은 남자아이의 옷을 구해 분장을 한 채 앞으로 좀 더 위로 올라서기 위해서 이것저것 막노동까지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평생 알지 못할 것들을 배우곤 했었다. 한 번 들킨 날은 정말 죽을 뻔했었지만.
하지만 그것들이 이제 저를 살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그때 부터 모든 일이 엇나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작은 비밀. 성스러운 힘과는 정반대의 힘인 모든 것을 파괴하고, 없는 것처럼 부식시켜버리는 저주와도 같은 힘. 한동안 독방에 갇혀 겨우겨우 그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된 날부터 시작된 비극.
어찌 보면 흔한 이야기 중 하나였다. 흔한 비극의 시작, 중요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옮겨오던 가문의 상단의 큰 배 여러 대가 전복했다는 것. 절대 무너지지 않을 듯 견고하게 보였던 제 가문은 차츰 기울기 시작하고, 늘 사치와 보석에 둘러싸인 채 삶을 살아가던 제 부모와 형제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도망쳐 수치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가 버린 자도 있지 않은가.
천천히 무너져가는 저택을 보며 생각했다. 그럼, 이제부터 나는 혼자 살아가야 하는 건가.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었다. 그래야, 그래야 보이지 않던 족쇄가 풀리지 않겠는가. 귀족의 성, '조이스' 를 버리고 평범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무엇의 귀속도 받지 않고, 눈치 볼 필요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신이 가장 원하던 삶, 귀족의 여인들이 기피하던 그 삶. 나는 이제 드디어...!
무너져가는 저택을 등지고 발을 힘껏 움직여 뛰어가기 시작했을 땐 정말로 그제야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제야 비로써 살아있다, 고. 하퍼 라는 여인의 심장은 인제야 온전히 뛰기 시작했다고! 짙은 달을 품은 눈동자가 빛나며 생기를 띈 채 누구도 찾지 못할 깊고 깊은 숲속으로 그 빛을 숨긴다.
있지, 그 숲 깊은 곳에 말이야. 아주 진귀한 약초와 광석이 있는데, 그곳을 지키고 있는 마녀가 있다고 하더군. 직접 본 사람은 없는데 그곳 근처만 가면 인기척이 아주 소름 끼치게 느껴진다지? 목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어! 여자의 목소리라고 하던데, 나이는 가늠할 수 없고. 듣자마자 소름이 돋아서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지 뭐야!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왔는데 그 약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거지. 결국, 여러 사람과 그 마녀를 사냥도 하고, 약초랑 광산도 찾으려 다 같이 갔는데... 어떻게 된 줄 알아? 다 사라졌대! 근처에는 그 사람들 옷이랑, 무기 몇몇이 남아있었는데.... 그것도 거의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더군! 이거,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닌가? 진짜 마녀가 사는 모양이야.
작은 마을에서 퍼져나온 소문은 쉽게 제국의 수도까지 퍼졌고, 마녀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그 누구도 직접 그 마녀를 잡으러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디 있는지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얼굴조차 제대로 본 이가 없다니. 두려움을 사기에는 충분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소문은 결국 소문이기에 이런 것으로 나라를 불안하게 해 그 틈을 타 무언가 침입을 한다거나 계략을 꾸미기에는 충분한 일이기에 결국 그 소문의 진상을 위해 불쌍한 한 소년이 파견되는 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쉽게 결정된 일이었다.
라이샌더, 평범한 소년. 하지만 신이 사랑하는 아이기에 높은 성력을 갖고 태어나 그 소년의 손이 닿으면 곧 죽을 사람조차도 흉터 하나 없는 깨끗한 모습으로 치료되는 그 놀라운 힘. 그것은 제국을 더욱 강력하게 할 무기로 사용하기에 충분했고, 소문을 잠재우기에도 충분했다.
그렇기에 소년은 자신의 충성을 맹세하며 고작 말 한 마리와 길을 떠났고, 소문의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자신이 그 마녀를 향한 소문의 원인을 찾으러 온 것을 안 마을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기에 충분했다. 결국 사람이 또 하나 죽어나겠어, 라며.
하지만 만나보기 전까진 모르죠, 해맑게 웃는 소년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달빛을 품은 여인이 도망쳐 간 숲속을 가리키자 그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기 시작하는 소년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모험한다 치기에는, 위험한가.
하지만 숲은 그 소년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듯 같은 길만 엇갈린 채 보여주었기에 한참을 헤매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은 그때, 거짓말처럼 지친 기색으로 헉헉거리는 소년의 앞에 쭈그려 앉아 소년을 마주 보는 이.
짙푸른 초록색의 조금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뱀을 닮기도, 달을 닮기도 한 시리도록 빛나는 두 눈동자. 이 소녀가, 그 마녀일까? 본능적으로든 생각이었다. 마녀라고 하는 자가, 이 여자구나.
당신은 마녀인가요? 호기심 어린 목소리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며 맞춰보라며 중얼거리는 그녀였지만, 오랜만에 다짜고짜 자신을 해치려 들지 않고 순수하게 물어오는 소년을 향해 작게 웃어 보인다. 보통 마녀라고 생각이 들었다면 도망가기 마련인데도.
너는 도망 안 치니? 꼭 도망쳐야 하나요? 결코 마녀와 그 마녀를 찾기 위해 온 사람 간의 대화라고 생각할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다 지쳐 보이는 소년을 우물가로 안내해 마치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 마시라는 말에 고맙다고 말하며 천천히 물을 마시기 시작하는 소년. 하지만 물을 마시라고 권해준 소녀의 손에 보이는 자잘한 상처를 그냥 넘겨 볼 수 없었던 소년은 소녀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천천히 손을 뻗어 손바닥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해 빛을 뿜어낸다.
그 빛은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어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손바닥을 쓸어주는 듯했고, 약초를 캐다 베인 자잘한 상처들을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지워내는 것에 크게 눈을 깜빡이며 그 행동을 지켜본다.
아, 인제 보니 소녀의 눈은 소년이 피워내는 빛의 색과도 같았다. 밝고, 조금은 노랗게 빛나는 빛. 한참 동안을 마주 본 채 있고 싶은 그러한 색. 그 눈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놀란 듯 손을 한참이나 이리저리 뒤집어 보던 소녀의 눈이 소년의 푸른 눈을 향하고, 소녀의 손 또한 소년에게로 뻗어 닿지 않았던 손이 맞닿는다.
...너는 내 손을 잡아도 괜찮은가 봐. 다른 사람은 못 잡나요? 나는 모든 것을 다 망가지게만 하거든. 하지만 저는 아닌걸요.
그래, 너는 아니네.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일까. 가족과 함께 먹고 잘 때도 느끼지 못했던 자신을 향해 보이는 순수한 호의와 따스한 온기. 그 손을 한참을 마주 보다 천천히 눈을 내리깐다.
손을 잡는 건, 좋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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