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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작업물

[사이퍼즈] 휴톤나딘

by 렛쓰 2020. 6. 22.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졌으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고는 했다. 제 세상이 무너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당장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 먼저 자리하는 것은 우습게도, 이기적이게도 자신이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도 없고, 늘 하루는 지독하게도 반복이 될 뿐이다. 실험체로 이용당하고, 마지막은 결국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버려지겠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세상이었으니, 평안하고 밝은 빛이 제게 따스하게 비춰올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평범한 일생, 누군가와 나누는 소중한 시간, 마주 앉아 먹고 즐기며 얘기하고, 감정이 생기면 고백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갖고.....

마치 머나먼 동화 속의 이야기인 것 처럼, 제게는 영영 그런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이상 소중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면 결국 제게는 약점으로 돌아올 것이니까. 결국에는 나를 배신하고 나를 이용할 것이니까. 결국에는...-


저벅저벅, 온기 하나 없이 서늘한 복도를 따라 가까워지는 걸음걸이. 끼익, 하고 움직이는 무거운 철문. 그리고 툭 툭 떨어지는 알 수 없는 목적의 약 소리와 제게 쏟아지는 수십 개의 눈. 이곳은 지옥이다. 영영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다. 정말로, 정말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눈을 내리감는다.




-



"...!"

헉!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숨을 쉬지 못한 사람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 손끝이 하얗게 셀 정도로 이불을 꽉 쥔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는……? 아, 그래. 꿈이었나.


늘 같은 악몽이다. 악몽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게는 일상이었던 것들이라서 악몽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것일까.
이제 이곳에 적응할 법도 했지만, 아직 믿기지도 않는 얼떨떨 한 날들의 연속이기 때문에 한숨을 내쉬며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천천히 침대 위에서 내려와 이불을 정리한다.

늘 이런 꿈을 꾸고 난 후에는 불안함에 진정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다른 날보다 더 꺼림칙하고, 기분이 나쁘고, 젖은 것처럼 눅눅한... 그런 기분.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없지. 싶어 일부로 씩씩하게 심호흡을 하며 옷을 제대로 갈아입고 간단히 씻은 후에야 이 전에 그가 사다 주었던 머리끈을 집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다.

원래 머리 같은 건 묶지 않았지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사다 줬으니까... 그를, 휴톤을 생각하면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후끈거리는 것이... 이런 감정은 생각하지도, 상상조차도 못해본 감정을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자신이 가끔 낯설기조차도 하지만, 이런 자신을 끝까지 기다려준 것은 그니까. 나도,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아.


그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문을 열고 나와 한 번 심호흡 하며 나가 인사를 하려 입을 연다.


"좋은 아...침? ....피터?"

평소라면 주방에서 밥을 먹느라 떠들썩 한다던가, 거실에 모여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시작됐을 하루였는데, 어째서인지 남아있는 것은 토마스와 나이오비씨, 그리고 레베카 씨 와 엘리, 피터 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내가 자던 사이에 무슨 일이?

어제 평소보다 무리하게 맥주를 마셔 깊게 잠이 든 것은 기억나지만, 설마 그 시간 사이에 전장에 나가야 할 일이라도 생겼던 건지 갑작스럽게 빠져나간 사람들의 모습에 당황스러워 어쩌지도 못하고 당황한 채 손끝을 떨다 그런 저를 역으로 진정시키듯 손끝에 닿은 작은 온기에 시선을 내려 저를 보는 짙푸른 눈을 마주한다.

"피, 터..."
"...곧 돌아온대."
"어?"
"돌아온다 그랬다고. 그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렇, 구나."

바보같이, 내가 위로해줘야 하는데. 내가 괜찮다고 다독여야 하는데. 어린아이에게조차 위로받는 나는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서러움과 고마움이 뒤엉킨 채 묘한 감정으로 제 손을 꼭 잡아주는 피터의 손을 마주 잡으며 상체를 숙여 조심스럽게 끌어안는다.
괜찮을 거야, 그렇지.

"..응, 피터가 괜찮다니까 당연하지."
"어, 어어.. 그, 그렇...."

'쾅-'

"여기, 부상자가 있어요! 치료 약이 필요해요! 레베카 씨, 책상 좀 치워주세요..!"
"...루이스, 씨..?"

모두에게 영웅이라 칭송받으며 작은 부상이지만, 어떠한 상황에도 동요 없이 모두를 이끌고 곧, 잘 승리하여 돌아오곤 했었다. 그 외 모두가 걱정된다는 말이 들어갈 만큼 강하고 능숙했기에, 늘 단단했기에...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보다 그는, 아론 휴톤, 그는 늘 앞장서서 모두를 지키고, 크게 다치는 일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가뿐하게 승리 해 한동안 걱정만 앞서서 어쩔 줄 모르는 저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나는 절-대 안 죽어! 그렇게 당당하게 소리치곤 했었던 그. 그의 밝게 빛나는 오른손은 정말 그것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더욱 단단하면서도 그만큼, 따스했는데.
늘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던 그의 팔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붉은색의 선혈이 흘러 색을 탁하게 더럽히듯 하였고, 늘 웃으며 맥주 마시러 가자며 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끌던 미소는 잔뜩 일그러진 채 거칠게 호흡한다.

왜? 왜? 어째서? 어째서... 어째, 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떨리고, 정말, 꿈속에서 바라왔던 것 마냥 세상이 무너지는 듯 머리가 어지럽게 울렁인다. 왜 그가 이렇게, 왜 하필 그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가? 왜?
지나치게 흔들린 이성에 휘청거리며 제 능력이 세어나가는 줄도 모르고 손끝을 벌벌 떨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귓가로 짙게 파고드는 환청에 그를 치료하려 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 사이로 눈을 질끈 감는다.


봐, 네가 약해서 그런 거야. 너는 쓸모가 없어. 네가 같이 갔더라면 이런 일은 없잖아? 쓸모없는 것. 방해만 돼! 짐이지! 네 쓸모가 있던 곳에 있던 걸로 감사했어야지! 네 탓이야, 네 탓이야, 네 탓이야! 네가 약하기 때문이야! 모든 일이 다 너 때문에 망쳐지고 있어! 이 괴물! 사라져!

아, 니야. 난, 나는, 아니야. 나는 괴물이 아니야. 나는.... 도와주고 싶, 어서, 내가 도와줘야...

모두에게 방해가 되는 건 너야, 어리석은 나딘.

아니야. 가쁜 호흡을 내쉬며 깨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점점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수많은 손이 바닥에서 자신을 끌어 내리며 네가 있을 곳은 이 깊고 깊은 절망일 뿐이라며 달콤하게 속삭이는 이 말. 그런, 가. 내가 모두에게 방해일까, 내가, 내가....


"왜 갑자기 능력이 써지질 않는 거지? 이게 무슨..."
"잠시만요! 잠깐... 아, 나딘씨? 나딘씨, 정신 좀 차려봐요! 방문을 열어요!"


주변에서 한 말 소리는 그저 잡음처럼 웅웅 거리며 귓가를 맴돌다가 금세 사라지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순간 모든 것을 잃고 포기한 사람 마냥 가빠지는 호흡을 툭 놓으려 할 때.

".....ㄷ......딘, ....... .....나딘씨!"
"...아?"
"정신 차려요, 호흡하고! 네?"

눈앞에 저를 붙들고 정신 차리라며 흔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조차도 흐릿하다. 누구지, 익숙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전혀 모르겠어. 무언가 제 눈을 가리고 있는 것 마냥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이 투박하고 흐릿하다. 눈은 자꾸만 감기려 하고,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멈췄던 호흡이 천천히 돌아왔지만, 눈이 감기기 직전 시야에 들어온 것은 휴톤의 푸르던 손, 그 빛. 그 빛의 감각만을 기억하고 그대로 정신을 툭 놓아버린다. 이렇게, 약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데….

 



-



여기는, 어디지. 온통 어둠이 짙게 내린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자신 외에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공허 속에서 두려워하면서도 이질적으로 드는 익숙함에 호흡이 가빠지며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린다. 꿈, 이겠지. 이건 꿈이야. 이런 곳은 존재하지 않아. 익숙한 기분이 들어서도 안 될 곳인데, 어째서.

아, 작게 신음하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나가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눈앞에 벽이 있기라도 한 것 마냥 그대로 다시 저에게 돌아와 곧 사방에서 메아리치며 저를 괴롭게 하기만 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나딘, 결국 넌 어떤 것도 하지 못했어."
"...트리비아, 씨?"

"...당신을 잠시라도 믿었던 제가 어리석군요."
"루, 루이스, 잠깐...."

"아이들에게서 떨어져! 너는 위험해."
"아니, 아니야, 나는....!"

"이제 언니랑 놀기 싫어. 언니 미워."
"내가, 내가 미안, 해, 응? 제발, 미워하지 마...."

내가, 내가 잘못했어. 의미 없는 말은 여전히 그대로 제게 다시 메아리 쳐 더욱 고통스럽게 제 가슴을 후벼팔 뿐.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겨우 쌓아 올린 소중한 인연이라 여기던 이들의 날카로운 말. 진심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리 생각해도 이미 그 말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제 심장을 찌르고, 그 칼날을 스스로 더 깊게 내리누르는 것처럼. 그런 걸까, 나는 그 누구의 곁에도 있을 자격이 없는 걸까. 나는 결국 있어선 안 됐던 걸까, 거기서 영영 있었더라면, 이런 다정함 따위 느꼈을 일도, 그리워할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어리석어서, 내가....


".....ㄷ..."
"나, 나는.... 아니야...."
"...딘, ...나딘..."
"내가, 내가, 끅, 흐으...."
"...왜 울고 그래, 나딘."
"..... ....휴톤?"
"...네 잘못 아니야! 괜찮으니까, 눈 떠. 울 거면 내 품 안에서 울라고."
"나는...."
"이제 일어날 시간이니까."


눈 떠, 나딘.



-


다시는 뜨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있는 눈을 순식간에 뜨며 갑작스레 들어온 빛에 미간 찌푸리며 천천히 신음한다. 분명,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뭐였을까,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쓰러지기 전에는 어떤 상황이었지, 휴톤이 부상을...


"....아?"
"...어, 그... 깼어?"
"....휴, 휴톤?"
"조금 멍한 것 같아서, 정신 돌아오면 말 걸려고 했는데... 몸은 괜찮아?"
"무슨... 아, 아니. 그건 내가 할 말이에요! 휴톤이야말로, 괜찮아요? 그때, 분명...."

크게 다쳐서 왔잖아요. 차마 거기까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서러움과 안도감, 그리고 미안함과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채 뺨을 타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 숙이며 제 얼굴 감싸 쥔다. 또, 이렇게 약한 모습만 보여주기만 하고.

"미안, 미안해요... 흐윽...."
"어어? 가, 갑자기 왜 울어?! 미안하다니, 뭐가! 네가 미안해할 일 하나도 없는데! 이, 이제 뚝하라고. 응?"
"그렇지만, 휴톤씨이..... 상처, 흑, 흐아앙...."
"아, 참.... 치료받았어! 이거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 옆에서 허둥거리며 우는 저를 달래가며 치료받았다는 말과 함께 그의 상처가 있던 팔을 쭉 내밀자 그제야 슬쩍 고개 들어 그의 팔을 본다. 정말 치료를 제대로 받은 건지, 흉터 하나 남김없이 깔끔하게 낳은 팔. 그의 단단하게 빛나던 푸르른 손도 마찬가지로 그 따스한 빛을 유지한 채. 정말, 괜찮은 걸까.

"자, 내 말대로 다 나았지? 정말, 너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내가 누구냐! 바로 아론 휴톤이 아니겠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만, 다친 적이 거의 없었잖아요. 너무, 너무 무서워서..."
"그리고 전에도 너랑 약속도 했었지. 나는 너를 두고 어디 안 가. 이렇게 겁도 많고 눈물도 많은 널 두고 어떻게 가냐."

그런 말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호탕하게 웃어주는 것에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있다 따라 웃어버린다. 정말, 정말로 신기하다. 방금 눈을 떴을 때까지만 해도 나락 끝에 아슬하게 서 있는 기분이었는데. 그가 다친 것을 알고 쓰러질 때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이렇게나 따스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까.

그의 해맑은 웃음기 어린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저의 모든 걱정거리는 금방 의미가 없던 되어버리며 저 또한 그를 따라 웃어버리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서툴면서도 하는 다정한 말, 어색하면서도 다가오는 다정한 손. 저의 상처를 끌어안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어주고, 늘 기다려주며 옆에 있어 주던 것은, 그였다. 이런 당신을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이런 욕심을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너무 무력해서 화가 나요. 모두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어요. 나는, 더 이곳에 속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그대로요…. 당신이, 다쳤을 때도 같이 챙기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바보같이 쓰러져서 더 일을 만들었잖아요. 순간적으로 능력도 세어나간 것 같아서 더더욱..."
"....나딘."
"욕심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모두와 함께, 휴톤과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될 것 같아요. 이대로는 모두에게 더 피해만 주고 말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순간 화가 난 듯 단단한 두 손이 제 어깨를 붙잡고 단호하게 얘기하자 움찔, 거리며 놀란 눈을 깜빡인다. 그제야 아차 싶은 건지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꼭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가 눈치를 보는 것 마냥 시선을 저에게 뒀다, 다른 곳에 두기를 반복하며 머뭇거리다 제 등을 감싸는 따스하고도 굳건한 손에 이끌려 그의 품에 기대어진 채 눈만 깜빡이다 붉어진 얼굴로 저를 내려보는 그를 마주 본다.

"....너는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인 걸 왜 모르냐. 너 쓰러졌을 때 다들 얼마나 걱정했다고. 정말,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을 정도라니까."
"그건...."
"그러니까, 그... 그런 생각 하지 말라는 말이야! 너를 좀 더 자랑스럽게 생각해. 너는 우리 연합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나, 나한테도."
"...휴톤."
"그러니까, 혼자 담아두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마. 힘들면 얘기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그러라고."

그런가,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어느 순간부터 심장 속까지 스며들어 저를 굳건하게 지탱해주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기댈 곳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싸주는 이. 정말, 정말로 그의 말처럼 욕심내도 괜찮은 걸까. 사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가 다쳤다는 사실보다 이대로 그를 잃어버린다면, 볼 수 없게 된다면? 그 사실에 덜컥 겁이 나 그 사실을 회피하고 싶어 숨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나약해. 그렇지만, 당신 곁에서라면, 이 곳에서 함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다 보면 나도 좀 더, 좀 더 당신처럼 굳건하게 서서 나아갈 수 있을까.

그의 품 안에 가만히 안겨 안심과 기쁨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며 천천히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당신은 늘, 따뜻한 사람이야. 내겐 너무나도 과분할 정도로. 아직, 아직 용기를 내어 사랑한다고 하지 못하는 나를 조금만 더 기다려준다면, 분명.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 들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보는 바다와도 같은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천천히 손을 뻗는다. 이 두 손을 잡아줄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곧게 뻗은 손은 그의 목 뒤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기대었던 상체는 점점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천천히 숨결을 좁혀가며 저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달싹이는 입술 위로 제 입술을 천천히 맞추며 콧가로 서로의 숨이 맞닿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내리감는다. 이대로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라 여기었던 벽이 천천히 허물어 내리고, 빛을 받아들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갈 길을 내어준다.

내 세상은 무너졌기에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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